[스크랩] 세계문화유산(737)/ 브라질/ 상크리스토바웅의 상프란시스쿠 광장
세계문화유산(737)/ 브라질
상크리스토바웅의 상프란시스쿠 광장
(Sao Francisco Square in the Town of Sao Cristovao; 2010)
Sao Francisco square Sao Cristovao
Sao Francisco square Sao Cristovao
Sao Francisco square Sao Cristovao
Sao Francisco square Sao Cristovao
Sao Francisco square Sao Cristovao
Church in São Cristóvão
상크리스토바웅의 상프란시스쿠 광장은 상프란시스쿠 교회와 수녀원, 자비의 교회와 성채, 주립 궁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같은 초창기의 중요한 건물들에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열린 공간이다. 주변의 18, 19세기 주택들과 함께 이러한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도시가 생성될 때부터 역사를 반영한 도시의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프란시스쿠 단지는 브라질 북동부에서 발전한 전형적인 종교적 건축을 나타내는 사례이다.
상크리스토바웅은 세르지페데우 레이(Sergipedel Rey)의 옛 수도였다. 이 도시는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의 영향력 밑에 있던 60년 동안 필리페 2세의 통치 중에 건설한 도시의 발전과 이 지역의 점령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15~17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미주 대륙을 점령하고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독특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식민지 정착촌을 세우고 무역을 하기도 전에 이미 아시아와 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점령하여 해상 무역망을 확립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해안을 점령하고 본국과 다른 식민지를 연결하는 지점으로서 항구 도시를 건립했다. 정착한 지역의 도시 계획은 지역적 조건을 감안하여 수립했다. 상크리스토바웅의 역사는 세르지피(Sergipe)의 식민지화와 관계가 있다. 당시에는 원주민의 저항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2개의 중심 도시인 사우바도르(Salvador)와 올린다(Olinda) 사이에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따라서 종종 프랑스 밀수꾼에 의해 차단된 주요 하천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브라질의 아메리카 원주민과 프랑스 밀수꾼들이 충돌하자, 크리스토방 데 바호스(Cristovao de Barros)는 식민지를 강화하기 위해 오늘날의 아라카주(Aracaju) 지방에 있는 포싱(Poxim) 강에 의하여 형성된 지협에 도시 상크리스토바웅을 건립했다. 필리페 2세는 그 땅이 그의 것임을 인정했다. 합의 과정에 힘을 실어 주는 동시에 그 땅이 식민지 주민들에게 분배되리라는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이 마을은 1594~1595년에 이전하였으며, 1607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세르지피의 주도가 된 상크리스토바웅은 사우바도르와 레시페(Recife) 사이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였으며, 19세기 중반까지 내륙 지방의 식민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1855년 주도는 아라카주의 도시로 이전되었다. 교회와 수녀원, 일반 주택과 함께 상크리스토바웅은 세르지피와 브라질의 과거를 증명하는 유적으로 남았다. 1938년 주 정부는 상크리스토바웅을 역사 기념물로 선언했다. 1941~1962년에 많은 유적이 개별적으로 보호되었고, 1967년에 상크리스토바웅의 ‘건축, 도시, 경관의 총체’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고고학, 민족지학, 경관 보호 도서[Archaeological, Ethnographic and Landscape Protection Book]’에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