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성묘 / 이화은

문근영 2018. 1. 2. 00:13

성묘

 

   이화은

 

 

 

여자라는 이름이 낡은 갑옷처럼 너무 무겁구나

네게 빨리 물려줘야 할 텐데 딸아 너는 어디 있는 거니

 

옷이나 집이나 사람이나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감옥이 되는 법이지

구속이 즐거운 때도 있었지만 봄날 같은 얘기란다

봄에 피는 복사꽃 같은 얘기란다

속절없다는 말은 상처에서 나온 말이지

 

딸아

어젯밤 너는 꿈속에서 내게 무거운 질문을 하더구나

엄마 낙태가 뭐예요?

그 질문이 너무 무거워 결국 나는 꿈의 문턱에 걸려 발목을 삐고 말았지

하느님과 씨름하여 아킬레스건을 다친 야곱처럼

 

원래 비유란 비겁한 자들의 비열한 방편이란다

직방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약은 수단일 뿐이야

 

사주팔자에 있다는 딸아

사주팔자에 주저앉아 아직도 내게 도착하지 않은 딸아

 

내 몸이 온통 사막이라 너를 찾을 수가 없구나

네 무덤을 찾을 수가 없구나

아프고 시린 곳이 무덤이라면 가슴에 있는 거니

사철 얼음꽃이 만발한

딸아 너는 아직도 자궁 속에 있는 거니

 

넝마 같은 나이를 걸치고 주저앉으니 거기가 무덤이네

내 몸 곳곳이 무덤 천지네

딸아 너는 도대체 몇 번을 죽은 거니

 

나는 다만 무덤의 어미일 뿐

태어나지도 늙지도 병들지도 않은 싱싱한 죽음의 어미일 뿐,

 

 

                        —《시와 표현》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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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경북 진량 출생. 1991년《월간문학》신인상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절정을 복사하다』『미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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