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식물인간 / 김호성
식물인간
김호성
전기 충격을 가하는 순간 줄기에서 늑대의 얼굴이 피어납니다 역류하는 침이 콧속에 고일 때 코털은 이파리가 되죠 다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수액을 빨아들이고 있으니 이제 인간의 목을 물 수 없습니다 아래로만 자라나던 시퍼런 손가락은 발기하고 침대를 울창하게 움켜쥡니다
입 벌린 줄기가 간호사의 치마 속으로 들어갑니다 시들어 가던 척추가 갓 태어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죠 식물에게는 벌렁거리는 구멍들이 필요합니다 줄기 끝이 갈라지지 않기 위해 구멍으로 꽉 조여 줘야 하죠
여러 명의 간호사와 동시에 플레이하는 것이 나의 생존 능력 그녀들의 몸에 줄기를 심을 때마다 배 속은 늑대와 식물이 공존하는 정글이 됩니다 우리는 침대를 둘러싸고 광합성을 시작해요 광합성은 몸속의 늑대를 쫓아내는 의식입니다
잘린 손가락 마디마디를 모아서 수십 개의 주먹을 빚습니다 아랫배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겁니다 툭 튀어나온 배꼽을 꼭지로 착각하는 나는 혀를 내밀어요 혀가 갈라지고 힘줄과 핏줄이 뒤섞이죠 몸 안에 자라나는 열매를 따서 줄게요
우리는 뿌리에서 해방된 최초의 인간입니다 새롭게 맞이한 이 생태계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계간《파란》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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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 / 1988년 서울 출생. 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졸업. 2015년 상반기《현대시》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