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세계문화유산(707)/ 멕시코/ 산 미겔 보호 지구와 아토토닐코의 나사렛 예수 교회

문근영 2017. 12. 22. 00:23

세계문화유산(707)/ 멕시코

 

산 미겔 보호 지구와 아토토닐코의 나사렛 예수 교회(Protective town of

San Miguel and the Sanctuary of Jesús Nazareno de Atotonilco; 2008)

 

 

 

Facade of the complex, Santuario Atotonilco

 

View of the main altar with the Virgin of Sorrows

 

Nave Atotonilco

 

Capilla del Santo Sepulcro

 

Ceiling section in the main nave, Ceiling Atotonilco

 

Section of the ceiling in main nave

 

Ceiling section in the main nave

 

 

 

 

 

과나후아토 현[Guanajuato Region]에 위치한 내륙의 왕립 도로[Royal Route]를 보호하기 위해 16세기에 스페인이 최초로 설립한 멕시코의 요새 도시로, 18세기에는 탁월한 멕시코 바로크 형식의 종교 건물과 일반 건물들이 많이 건축되어 절정을 맞이했다. 건물의 일부는 바로크 양식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의 걸작이다. 도시에서 14떨어진 곳에 있는 나사렛 예수 교회는 18세기의 작품으로, 뉴스페인(New Spain) 지역에서 바로크 예술과 건축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이 교회는 큰 교회 1개와 작은 예배당 몇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드리게스 후아레스(Rodriguez Juarez)의 유화와 미겔 안토니오 마르티네스 데 포카산그레(Miguel Antonio Martinez de Pocasangre)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산 미겔 데 아옌데(San Miguel de Allende)는 위치상 스페인 사람들과 크리오요(criollo; 남북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아토토닐코(Atotonilco) 나사렛 예수 교회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문화가 교류해서 생긴 특이한 사례로 손꼽힌다. 건축 양식과 내부 장식은 예수회를 만든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산 미겔 데 아옌데는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의 내륙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국토와 도시를 개발한 초기 사례이다. 도시는 18세기에 중요한 종교 건축물과 일반 건축물을 건설하며 번성했다. 이 도시는 바로크 양식에서 19세기 말의 신고딕 양식까지 여러 가지 경향과 양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도시 지역의 대저택들은 중간 크기의 라틴아메리카 주택과는 달리 아주 크고 사치스러우며, 바로크 양식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나사렛 예수 교회는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의 교리에서 영향을 받아 구현된 뛰어난 건축물이다. 내부 장식, 특히 벽화는 이 교회를 멕시코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도시와 교회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멕시코의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 유산은 완전성과 진정성이라는 필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도시와 교회 모두 그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도시는 그 특징과 규모에 맞게 변화했고, 적절한 이론과 기술 원칙에 따라 복원이 되었다. 법률을 통해 유산을 적절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도시와 교회는 모두 보존 상태가 만족스럽다. 관리 정책과 구조계획을 마련해 유산의 가치완전성진정성을 보존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등재 신청서에는 엘 바지오(El Bajio), 왕립 내륙 도로, 산 미겔 데 아옌데로 알려진 지역의 지리경제사회문화역사가 아주 폭넓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1521년에서 16세기 중반까지 뉴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이 중 하나가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서 현재 미국 남부까지 중요 도시와 광산 중심지를 잇는 왕립 내륙 도로였다. 이로써 길을 따라 새 마을이 생겼고, 이 마을들은 방어의 중심이 되었으며, 지역을 식민화하고 자원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1542년에 프란시스코 회 수도사인 후안 데 산 미겔(Juan de San Miguel)산 미겔의 인디언 마을을 발견했는데, 이곳은 1555년에 스페인이 세운 산 미겔 엘 그란데(San Miguel el Grande)의 주요 지역이 되었다. 산 미겔 엘 그란데는 사카테카스(Zacatacas) 도로를 보호하려고 세운 것이었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개발하는 데 기본 요소인 영토 감시와 물 공급의 가능성을 감안해 산 미겔 엘 그란데를 주요 입지로 선택했다. 산 미겔은 바지오(Bajio)로 알려진 곳에 있는 광대한 평야 지역이며, 천연자원과 토양, 온화한 기후 덕분에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 중 하나이다. 이런 조건 때문에 식민지 시기 초기부터 광산업과 농업, 목축업, 상업과 제조업이 발전했다. 바지오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뉴스페인의 첫 번째 초대형 수도로 좋은 주거지였다. 17세기 말까지 이곳의 인구와 경제 재원은 계속 성장했다. 마을 입구의 상업 도로를 따라 주요 광장과 인접해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대저택, 일반 건물과 종교 건물, 공공건물에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공공건물과 정부 청사를 수리할 때는 이 지역의 마을이 맡고 있는 정치적행정적 역할과 관련해 우선순위를 정했다. 뉴스페인 지역은 18세기 동안 광산업이 부흥기를 맞이하고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제 회복기를 보냈고, 상업 체계는 통신망에 의존했다. 바지오 지역에는 과나후아토(Guanajuato)나 케레타로(Queretaro)처럼 특별한 기능을 하는 여러 작은 마을과 중간 크기의 도시들대도시들이 있었다. 따라서 18세기에 바지오는 뉴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계속 도시화가 되었다. 산 미겔 엘 그란데는 스페인 도시와 마을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에 따라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형 조건과 특히 토지와 물 등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성, 종교와 권력의 지리학적 분포 상황, 경제 활동 범위, 인구의 계급 구조를 고려해 도시 환경을 조성했다. 1730~1760년에는 고대의 솔레다드(Soledad) 광장에서 16세기 이후 교구 성당이 자리를 잡았던 광장 지역으로 마을의 권력과 지배 공간이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지주와 상인들이 이곳에 새 주거지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산 미겔은 19세기 초부터 멕시코 독립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독립 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이그나시오 아옌데(Ignacio Allende)가 바로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이름도 이 영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사회적경제적 발전이 새 공공건물 건축에도 반영되어 건축 양식의 변화를 보여 주는데, 18세기 건물에 신고딕 양식을 더해 지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옆의 교구 교회 정면이 가장 뛰어난 예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의 현대화를 보여 주는 또 다른 도시적건축적 요소는 앙겔라 페랄타 극장[Angela Peralta Theatre]과 베니토 후아레스 공원[Benito Juarez Park]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많은 멕시코 인들과 외국인들이 산 미겔을 찾았다. 이 도시는 식민지 도시의 특징과 온화한 기후,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최적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 현상 때문에 도시의 특징이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대 건물을 복원하고 개조해 유적 보존과 도시, 건축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또 음악이나 극장 등에서의 문화 활동이 더해지면서 산 미겔은 생동감 있는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2년에 제정된 '고고, 예술, 역사 구역 및 연속 유산에 대한 연방법에 따라 산 미겔의 역사적인 중심지는 1982년에 역사 기념 지구로 지정되었다. 루이스 펠리페 네리 데 아파로(Luis Felipe Neri de Alfaro) 신부는 1748720일에 아토토닐코의 나사렛 예수 교회를 설립했다. 신부는 이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강도와 살인을 방지하고 기독교 교육을 하려고 했다. 이곳에는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의 교리에 따라 예배를 보는 6개의 작은 예배당과 큰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교회는 아파로 신부의 학문적, 교리적 업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2세기 전 토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o]에서 벗어나려는 가톨릭 정신도 반영한다. 이 기념비적인 유적은 174053일에 짓기 시작해 1763년까지 계속 지었다. 교회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방문하는 순례지로 자리를 잡았다. 산 미겔은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토토닐코에서 과달루페의 성모의 이미지가 나타나 멕시코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등재 기준/ 기준 (): 산 미겔 데 아옌데는 인류의 가치를 서로 교환한 특별한 예이다. 도시는 위치와 기능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과 크리오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형과 무형의 전통 문화를 교환한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아토토닐코 나사렛 예수 교회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서로 교류한 이례적인 예이며,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의 교리를 지역의 특성에 맞게 해석해 건축 양식과 내부 장식에 적용했다. 기준 (): 산 미겔 데 아옌데는 16세기 도시 배치를 토대로 하여 각기 다른 건축 경향과 양식이 합쳐진 이례적인 예이다. 종교 건축물과 일반 건축물은 서로 다른 양식이 어우러져 하나의 도시 경관으로 잘 통합하고 발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중간 규모의 라틴아메리카 주택과 달리 도시 지역의 대저택들은 아주 크고 사치스럽다. 나사렛 예수 교회는 내부 장식이 멕시코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아주 특별한 종교 유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출처 : 댕견 그리고 우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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