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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해양수산부 폐지, 국가해양력을 우려한다 / 주강현

문근영 2017. 12. 20. 00:46

 

 

해양수산부 폐지, 국가해양력을 우려한다

주강현(한국민속문화연구소 이사장)


신정부 인수위원회의 해양수산부 폐지 결정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그만 지켜만 볼 수 없어 해양문화전문가로서 이의 부당성을 적시하고자 합니다. 한민족의 미래의 운명이 달린 이번 사안에 관하여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해양수산부의 존폐를 이기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아님을 거듭 밝히며, 국가해양력 제고가 왜 21세기에 중차대한가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첫째, 해양의 제 문제들이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논의되는데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여,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해양을 포기하다시피 한 빈곤한 역사관 덕분에 일본을 위시한 해양세력들에 의하여 식민 지배를 당하는 슬픈 역사를 거쳐야했습니다. 영국, 일본, 네덜란드 등을 굳이 예로 들 필요도 없이 국가해양력은 반도국가의 운명이며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해양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이웃 일본의 경우, 보편적 국민 다중이 갖고 있는 국가해양력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으며, 이는 오랜 세월동안 형성 발전되어온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한반도는 해양에 관하여 무시 및 무지로 일관하였으며 아직도 일반의 해양에 관한한 낮은 인식수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양기관들을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국가해양력의 종합적 중심을 구축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현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 육지중심사고에서 해양중심사고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육지중심사관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역사는 전혀 달리 보입니다. 지구의 7할 이상이 바다라는 수치를 들이밀 것도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에게문명은 두말할 것 없이 바다의 역사입니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 펼쳐진 거대한 드라마는 인류사를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이 같은 사례에서 입증되듯 해양중심의 역사관으로의 인식전환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독도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제대로 대처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지사’(陸地史) 중심의 빈약한 사고로는 안 됩니다. 세계사적 규모에서의 해양사적(海洋史的) 인식 없이는 독도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육지는 무어라 해도 한반도의 땅으로써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도서와 바다는 다릅니다. 독도, 이어도 뿐 아니라 200해리 영유권분쟁이 도처에 잠복되어있습니다.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일은 육지에 머물면서 수동적으로 방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적극 나아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육지로 뒷걸음쳤던 조선시대의 잘못을 다시 범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종합적 관리가 중요하다


셋째, 바다의 종합적 관리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가령, 경기도는 경기도청이, 경상도는 경상도청이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경계는 실제로는 없습니다. 가령 태안에서 엎질러진 기름이 남해안까지 흘러갑니다. 종합적 사고가 필요한 것은 바다가 지니는 특수한 조건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종합적으로 개발, 관리, 보존하는 일은 선진각국의 보편적 입장입니다.

수산을 농림부에, 항만은 건설부에 갖다놓는다 칩시다. 남획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환경부로 찢어놓게 됩니다. 해양과학은 전혀 다른 부서로 갑니다. 각광받는 해양관광은 문화쪽으로 갑니다. 가령, 해양탐사를 위해 대양으로 나갈 때, 수산은 농림수산식품에서 관장되어야하고, 해양자원채취는 이곳저곳에서 해야 하고, 해양문화는 증발됩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해양엑스포는 이도 저도 아닌 지방행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바다를 소홀히 해온 역사를 돌아보라

돌이켜보면 바다는 천출(賤出)로 내몰린 ‘갯것’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문화사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 왔으며, 역사는 있되 기록은 없는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존재였습니다. 한국문화 전반에 비추어볼 때, 아직도 바다는 천출입니다. 바다중심의 사고는 미약하게 존재하며 오로지 육지중심 사고만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국가해양력제고는 분명히 무한한 기회가 열려진 21세기형 사고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사의 파장이 일국사(一國史)가 아닌, 세계사(世界史)라는 총체적 안목에서는 너무도 쉽게 들여다보입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천 년간 불러온 동해 명칭조차 미국·영국 등 해양제국들에게 장악된 국제수로회의에서 일본해(JAPAN SEA)로 등재된 덕분에 ‘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제국의 바다 건설에서 한반도도 예외 없이 그 거친 파도를 받았습니다. 다만 수세기 동안 밀려온 그 물결이 한반도 해안에서 급격히 몰아쳐서야 비로소 거대한 파장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으니,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내면을 다시금 되돌아봅니다. 울릉도 문제를 국제적 차원에서 해결한 안정복은 영웅처럼 인정받았을 것 같지만 정작 끝내 귀양살이로 내팽개쳐졌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봉도, 즉 울릉도를 개척했던 김한경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의 딸은 노비로 팔려갔습니다. 독도수비대도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총탄에 쓰러졌기에 망정이지, 혹시나 살아있었더라면 전후에 시기·질투·모함에 시달려 대역죄인으로 내몰리지나 않았을까합니다. 그러한 정황은 너무도 정확하게 포착됩니다. 극악한 해적에게까지 경(Sir) 호칭을 부여하며 해양제국건설로 내몰은 영국의 사례를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바다를 지켜온 자, 그네들은 예외 없이 죽거나 죽음 직전으로 내몰렸으니, 대체 어떻게 이런 역사가 있었던가요!

다산선생의 ‘해도경영론’을 상기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해도경영론’을 피력하는 것으로 제 글을 끝낼까 합니다. 착취의 대상으로만 전락하여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섬의 처지를 간파하고 해양부국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정다산은 조정에서 전혀 해양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음을 비판하였습니다. 조선의 땅이 편소하여 북쪽은 2천여 리에 불과하고 남쪽은 1천 리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남쪽에 널리 천여 개의 섬을 주목하였지요. 물론 그의 탁월한 견해가 정부에 의해 받아들였을 리 만무합니다. “나라의 재력이 빈약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내 생각에는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한 번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할 것이다.”

그는 강진바닷가에서 오랜 귀양살이를 한 탓에 바다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방에 지지 않는 외번(外藩)으로서 남방을 중시하는 다도해정책론, 남방경영론을 표방합니다. 올바른 해양경영으로 무명의 물건이 산처럼 쌓이는 풍경을 다산은 예견하였던 것입니다. 국방·경제·수산의 보루로서 종합적인 해양정책을 일찍이 제시한 다산의 실사구시를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한 봉건왕조의 그릇된 정책은 유전인자처럼 20세기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묻습니다. 21세기에도 위와 같은 오류를 범할 것인가요. 해양의 좌표는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명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국가해양력이 확대되기는커녕 이처럼 처참하게 분산 해체되어 후손들에게 죄가 될 것이 분명한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떤 지혜를 발휘해야할까요.

태안에 엎어진 기름덩이를 닦으면서, 기름을 제거하는 일은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기름을 엎지르는 것은 순식간임을 알았습니다. 해양수산부를 없애는 것은 어쩌면 간단할 수 있지만, 국가해양력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 또 묻고, 그 해결책을 찾고자 합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를 불문하고, 정치적 구조조정의 제물적인 희생타로 바다를 역사에서 지우기 전에 한 번 더 깊게 바다를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려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글쓴이 / 주강현
· 한국민속문화연구소 이사장
· 제주대 초빙교수
· 해양문화재단 부설 해양문화연구소 소장
· 문화재 전문위원
· 저서 :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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