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계문화유산(690)/ 멕시코/ 모렐리아 역사 지구
세계문화유산(690)/ 멕시코
모렐리아 역사 지구(Historic Centre of Morelia; 1991)
미초아칸(Michoacan), 모렐리아 지구[Mairie de Morelia]에 속한 모렐리아는 16세기에 건설된 스페인의 르네상스 사상과 중앙아메리카의 경험을 융합한 도시 계획의 훌륭한 전형을 보여 준다. 언덕으로 된 경사 부지에 따라 형성된 이곳의 도로는 아직도 원래의 도시 배치를 잘 따르고 있다. 200채가 넘는 역사적 건축물들은 모두 지역의 특성이 강한 장미색 사암으로 지었으며, 도시의 건축 역사를 반영하면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신고전주의 원리와 중세시대 정신의 융합을 드러내고 있다. 모렐리아 역사 지구에서는 중요한 독립투사들이 출생했으며, 국가의 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후 조건의 취약함, 역사적인 우여곡절, 끊임없는 도시의 발전 속에서 모렐리아 역사 지구는 격자 배치에 장미색 사암으로 지어 올린 원래 건축물들을 보존했다. 이 오래된 건축물들은 스페인 르네상스 사상과 중앙아메리카의 경험을 융합한 도시 계획의 손꼽히는 전형으로, 언덕 지역의 경사에 따라 형성된 이곳의 도로는 원래의 도시 배치를 잘 따르고 있다. 모렐리아 역사 지구는 중요한 독립투사들이 출생하여 국가의 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37년 미초아칸 지방의 과얀가레오(Guayangareo) 원주민 마을에 프란시스코회 수사회가 설립되었다. 1535년 뉴스페인(New Spain)의 첫 식민지 총독인 안토니오 데 멘도자(Antonio de Mendoza)가 1541년에 새로운 주도로 만들어 도시 이름을 바야돌리드(Valladolid)로 고쳤다. 50개의 귀족 가문이 정착한 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유럽 인들이 건너왔으나 그 인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상태이며, 오히려 원주민 인구가 우세하다. 바야돌리드는 미초아칸에 첫 주교의 집무실이 있었던 파츠쿠아로(Patzcuaro)와 오랜 세월 경쟁 관계였다. 사람들에게 추앙받던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재위 기간에 바야돌리드에는 1580년부터 주교의 집무실이 있었고, 산 니콜라스(St Nicholas) 대학[1540년 파츠쿠아로에 설립됨]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도시의 경제와 문화적 생활은 17∼18세기에 걸쳐 계속 번성했다. 바야돌리드는 지성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면모를 갖추었는데, 19세기 초 멕시코의 독립 투쟁을 전개하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멕시코 독립을 위해 투쟁을 이끈 인물은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e Maria Morelos) 신부였다. 바야돌리드 태생인 모렐로스 신부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1828년에 도시의 이름을 모렐리아 역사 지구로 개명했다. 미초아칸의 주도인 모렐리아 역사 지구는 19세기 초 멕시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치열한 격전지였다. 1869년에 공화국이 재결성되자 도시는 다시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했던 과거의 영화를 되찾았다. 최근 들어 급등한 인구수는 도시의 문화유산이 처한 위기 상황과 관련이 있다. 역사 도시의 건축물 249채 중에서 공공건물 20채와 성당 건물 21채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 역사 지구의 모든 건축물들은 지역의 특성이 강한 장미색 사암을 사용했으며, 도시의 건축 역사를 반영하면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신고전주의와 중세시대 정신의 융합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