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새해 새 아침에 황당무계함에도 어찌 내 학설(?) 하나를 소개치 않을 수 있을 손가.
21세기는 황인종이 지배할 시대가 되리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이러한 나의 믿음은 ‘철학적인’ 배경과 ‘기술적인’ 측면, 두 개의 요인에 기인한다.
자연을 벗 삼는다
첫째로, 우리 동양인은 고래로부터 음풍농월(吟風弄月)이니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니 하며, 자연과 벗 삼고 자연에 동화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즐기고 또 높이 기려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풍 같은 것을 가더라도 흔히 ‘자연을 벗 삼는다’는 말투를 즐겨 덧붙이지 않는가. 물론 그 말속에는 자연을 즐기면서도 자연을 가까운 벗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의 손때 묻은 인간적 겸허함이 깃들여 있다.
자연을 벗 삼는다는 것은 특히 우리 동양인의 오래된 생활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연을 순수한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잡이로 쳐 뺏어 들어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동화하고 자연을 닮아가려는 몸짓이 우리들에게는 더욱 친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서양인들처럼 자연을 갈아엎거나 자연에 대해 정복 전쟁을 벌여나가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서 노니는 온유한 음풍농월이 우리네 본연의 삶의 흔적이었노라 이를 수 있다. 자연을 향해 삿대질하기보다는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자 했던 것이, 우리 옛 어른들의 기특하고 갸륵한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물론 이른바 근대적 과학문명을 뒤늦게 밟아나감으로써, 자연과 싸움질하는데 익숙했던 ‘앞선’ 자들로부터 억눌리고 노략질 당하는 아픈 세월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상흔을 짊어진 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장자(莊子) 선생처럼 풀이하면, 소의 코를 자연이라 이른다면 이 코를 꿰뚫고 있는 코뚜레를 문화나 문명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양인은 오히려 자신들의 코에 열심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코뚜레를 만들어 걸고 그것에 질질 끌려 다녀온 존재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서양은 과연 앞서가고 있는가?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지구를 살리자!’느니, ‘자연을 보호하자’는 등의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 동양인은 그저 우리의 피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자연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경과 애정을 다시 불 지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21세기가 황인종이 지배할 시대가 되리라는 첫 번째 ‘철학적’ 이유다.
손재주가 환상적
둘째, 기술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이 세계는 거함, 거포주의에서 엿볼 수 있듯이, ‘거대한 것’을 잘 만드는 부류에 의해 지배당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는, ‘정보화’ 등에서도 드러나듯이, ‘정교한 것’을 잘 만들어내는 종족이 지배하게 되리라 예측된다.
그런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들의 손재주는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백인들은 우리 동양인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기능 올림픽에 나가기만 하면,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달을 독차지하고 돌아오지 않던가. 그리고 컴퓨터만 하드라도, 미국이 일본에 쩔쩔매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것이 두 번 째 ‘기술적인’ 측면이다.
미국은 ‘확대지향성’을 추구하는 나라다. 거창한 크기의 규모에만 매달리다보니, 그것을 정교하고 치밀한 알짜로는 채우지 못해, 허전하고 허황한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이러한 미국적 경향은 가령 일본의 ‘축소지향성’과 멋들어지게 대비되기도 한다. 예컨대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며 재기발랄한 이론가이기도 한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은 “만일 일본이 핵무기 제조 허가를 받게 된다면, 일본은 틀림없이 ‘포켓용 핵무기’를 단숨에 만들어낼 것”이라고 역설한 적이 있을 정도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지금까지 이 세계를 번갈아 가며 지배해왔다. 예컨대 한때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대륙 세력에 짓밟혔던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해양 세력의 선두주자인 영국에 의해 재탈환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아시아도 대륙 세력의 대표격인 중국이 오랫동안 제패하다가 해양 세력인 일본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다시 미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의 지배로 굳어진 듯하다. 하지만 오늘 날 중국의 급성장에 힘입어 대륙 세력이 괄목할 만하게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 한반도는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
나는 한반도를 함초라 부른다
한반도의 운명은 보신탕의 그것을 닮았다.
금강산은 복 받은 산이라 그런지, 철따라 이름도 많다. 봄에는 그냥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들 부른다. 이 고귀한 명칭들은 모다 금강산의 빼어남을 칭송하기 위해 여러 사연을 배경으로 하며 형식미를 갖춰 부쳐진 것들이다.
허나 은연중 마치 우리나라의 고달픈 숙명을 암시라도 하려는 듯이 색다른 형식미를 쟁취하고 있는 서러운 이름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건 바로 보신탕이다.
이 음식에는 개장국, 단고기, 사철탕, 영양탕, 멍멍탕, 그리고 심지어는 한때 존슨탕이라는 이름까지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암호처럼 그저 “있습니다”라는 표지판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드시 보신탕이 뒤따라 나오기도 했다. 이 이름들은, 물론 금강산의 그것과는 달리, 떳떳하지 못하거나 부끄러운 것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형식적으로 얽어 짠 것들이다. 사랑 받는 우리의 오래된 전래 음식이면서도, 겉모양을 적당히 꾸며 눈치를 살피면서까지 궁한 목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구한 몰골로 나날을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처연한 실존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딱한 실정은 아닐는지 ….
나는 한반도를 함초(鹹草 = 짠맛이 나는 풀이라는 뜻)라 부른다.
함초는 전라도 해남 같은 맑은 해안에 자생하면서 바닷물을 흡수하고 자라는 1년 생 초본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불로장생을 위한 매우 귀한 풀로 알려져 있다. 이 함초는 육지 풀이면서도 동시에 해수(海水) 속의 모든 성분을 간직하고 있는 풀로서, 육지에서 바다로 빼앗겼던 영양을 다시 바다로부터 우리에게 이상적으로 환원해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황구성은 자신이 쓴 <약선>(藥膳)이란 저술 속에서 이 함초야 말로 성인병과 난치병 등, 각종 현대적 질환을 마지막으로 구제할 수 있는 최후의 명약이라 높이 기리고 있다.
바로 이 함초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반도 역시 대륙성과 해양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공략 당해온 뼈아픈 치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립과 적개심으로 분칠된 이 세계를 미래지향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기능할 가능성 역시 지극히 높지 않겠는가.
1840년대 말 젊은 엥겔스는, “독일인들은 민족의 이해관계와 진보의 이해가 마주치는 곳에서는 결코 민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이 진보를 거역했던 곳에서는 언제나 민족적이었다”고 절규하며, 독일 민족의 내면적 모순구조를 예리하게 도려내 보여준 적이 있었다. 독일 민족의 민족적 각성과 결속이 항상 진보를 거역하는 역사적 반동으로 기능해왔다는 엥겔스의 이러한 날카로운 글 화살은, 사실 그가 죽고 난 후에 오히려 찬연하게 표적을 꿰뚫었다. 우리나라는 과연 어째야 할까?
우리 한반도는 민주주의 확립, 외세 극복 그리고 민족 통일이라는 세계사적인 과업을 힘겹게 짊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민족 통일은 특히 적대적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 평화적 통일까지를 달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끝없는 가시밭 길을 돌파함으로써 결국 날카로운 가시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장미와도 같은 세계사적인 결실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민족적’이 됨으로써 역사적 ‘진보’에 헌신적으로 공헌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를 분출하게 될 것이다.
새 아침은 낙관주의로 빛나야
한 아빠가 공원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걸음마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못했다. 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고, 아이는 겨우 한 걸음을 떼고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아빠는 다시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 …. 아빠와 아이의 걸음마 연습은 이렇게 계속 되었다.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그 아빠에게 말했다. “당신은 공연히 헛수고만 한 것 같소. 애는 오늘 여든 번이나 넘어졌소.”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요? 오늘 우리 아이는 여덟 걸음이나 혼자서 걸은 걸요.”
우리 한반도는 아이의 걸음을 세는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아니면 아이가 넘어진 횟수를 헤아리는 자세를 고수해야 할까?
사람은 길 위의 큰 바위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자그마한 돌뿌리다. 약자는 이 돌뿌리를 걸림돌이라 생각하지만, 강자는 그걸 디딤돌이라 여긴다. 비가 오면 비관주의자는 땅이 질척거릴 거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 말한다. 낙관주의자는 살아 있는 것이 기쁘다 하고,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것이 슬프다고 말한다.
우리 한반도의 새 아침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 나가는 낙관주의로 빛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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