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비망의 다른 형식 / 조정인

문근영 2017. 12. 4. 23:26

비망의 다른 형식

 

  조정인

 

 

 

모니카,

내 안의 푸른 광물과 아득한 기체로 사는 사람

멀리 치통의 반란 같은 통증으로 당신이 온다

 

작정 없는 열망으로 질주하던 밤, 잠들어서도 되놰 부르던 이름이 불어나

잠의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했었다

 

사랑이 종을 흔들며 방문 앞을 지나 뒷등을 보이며 복도 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빈 복도로 나가 방금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운명의 맨발

갈라터진 발뒤꿈치를 보았다

 

어느 봄날, 당신은 흰 수도복 속에서 영역이 다른 사람으로 웃고 있었지

당신은 아침 식사 때 접시 밑 메모지에 적힌 임지(任地)대로 간략하게

짐을 챙겨야 하는 사람

 

당신의 임지는 어디일까 밤의 검은 창문들아 말해다오 나는 위급했으나

당신은 유리창 속에서만 목을 젖히고 눈부시게 웃는 사람

 

투명해서 아픈 날엔 유리창에 당신의 맑은 콧날을 그렸다 작은 한숨을

 

당신의 둘레에서 흰빛을 조금 가져다가 화분에 묻었지만

스무 해 넘게, 나는 빙하 속 사계를 건너야 했던

혼령으로 사는 사람

 

화분에는 쇠락의 계절이 우거져 모노드라마의 일인배우처럼 서 있는 오렌지나무

마른 이파리 몇 흘려두고 우두커니 빈손을 내려다보는 불임의 나무 한 그루

 

므네모시네*가 폭설을 몰고 창 앞을 지나가는 어느 해거름녘

 

나의 오렌지나무 흰 불꽃에 에워싸이네, 저의 이름이 왁자하게 불붙어

날개를 퍼덕이네 사라진 두 팔 사라진 가슴, 텅 빈 사라진 자궁에

어떤 먼지 한 점이 착상된 것일까

 

고백은 홀로 타오르는 말 나의 말은 한 그루 꽃나무처럼 당신께 열려있네

시간의 연약지반을 뚫고 당신이 온다, 나의 모니카

 

 

———

* 기억의 여신

 

 

                       —《현대시학》2016년 7월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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