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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몸보다 말이 먼저 아픈 / 한현수

문근영 2017. 12. 4. 23:25


몸보다 말이 먼저 아픈

 

  한현수

 

 

 

보랏빛 모자를 쓴 소녀가 휠체어에 앉아 있네

엄마에게 뭔가 말을 꺼내려는 것 같은데

기울어지는 어깨 위로 등꽃이 피네

 

혀끝에 첫 말을 올려놓기도 전에

몸이 꼬이고 얼굴이 찌그러지고 있네

 

내 가 등 나 무 에 서 나 왔 나 봐

 

소녀가 조각조각 웃네

자꾸만 등꽃 향기 번지는데

 

숨 막힐 듯 비틀어

몸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

 

겨울에 자라난 말이 등꽃으로 피는 오월

꽃잎은 비틀어 터져버린 말의 숨결이지

몸보다 말이 먼저 아팠던 거지

 

질긴 말더듬으로

몸속으로만 숱한 말을 흘려보냈던 거지

 

 

 

                        —《시담》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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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수 / 시인, 가정의학과 전문의.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2012년 《발견》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오래된 말』『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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