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외올실 / 기 혁

문근영 2017. 12. 4. 23:22

외올실

 

  기 혁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오며 보았던

발자국 위 또 한 발자국

초겨울의 숫눈 위로

네 발 달린 맹수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핏덩이 같은 고백을 송곳니로 깨물고

허물어진 담장 밑

배고픈 새끼들을 향해 가듯이

당신을 기다리던 나를 앞질러

개들이 짖어대던 청춘의 모퉁이를

아침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무수한 화살이 태초의 맹수를 겨누고

더운 심장을 길들이기 위한 올무가

시간을 잡아끌었지만 매번

붙잡혀온 것은 직립의 절뚝거림뿐

하얀 입김을 내뿜는 살점과

얼룩무늬 등허리의 촉감을

어째서 상처도 없이 거두려 한 것일까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두 번째

막다른 골목에 고독이 갇히고

나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까지 이어진

긴 핏자국의 행렬을 고쳐 쓴다

창문 너머 당신의 음영이 비칠 때

슬픔은 마지막 발자국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형광등 아래

당신의 발치께에 눈이 쌓이면

눈 때문에 디뎌야 할 봄날이 먼저 시리다

떠나간 사랑을 아는지

그것은 맹수가 맹수를 부르다 흘린

눈물 속 내력이며

결빙의 발을 감춘 야경이 포효하던

홀로 선 인생의 뒷모습이었다

 

 

———

* 외올실 : 오직 한 가닥으로 이루어진 실

 

 

 

                     —《시로 여는 세상》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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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2010년 《시인세계》신인상(시), 2013년 《세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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