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그리고 서정적인 나의 소금 / 권현형
문근영
2017. 12. 4. 23:11
그리고 서정적인 나의 소금
권현형
빈집의 안감에서 오래전 감정의 냄새를 맡았다
열여덟 분홍 저고리의 수줍은 항하사가
금사 은사로 얽혀 있는 장롱 속 고백은
오직 사진으로 피어 있는 한 송이 수련을
위한 것이라 날마다 간절히 늙어갔다
좀약 덕분에 생생하게 낡아갔다
할머니가 살다 떠난 집은 소금 자루로 그득했다
혼자 마지막까지 집을 지키는 것은 절여진 빛, 절여진 어둠
오십 년 전의 기억으로 백 년 전의 기억으로
혼란기마다 우울할 때마다 필요했던 소금에 대한 맹목
쟁여놓은 흰 자루가 쌓여 빈 집은 소금창고가 되었다
모든 지나간 날을 기억하는 유전자
기억이 창고를 갖는 것은 조상들이 소금을 쟁이는 버릇 때문
심연은 짠맛, 흰 소금의 추억은 썩지 않고 남았다
꽃과 맹세와 기도가 있던 밤의 육체도 썩고
처녀의 목을 늘여 놓은 말편자의 육체도 녹슬었건만
—《시사사》2016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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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중독성 슬픔』『밥이나 먹자, 꽃아』『포옹의 방식』.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숙명여대 등에 출강.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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