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오후 / 이우성
문근영
2017. 12. 4. 23:08
오후
이우성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선생이 말씀하셨다
잘 때 자고
먹을 때 먹고
쌀 때 싸면
잘 사는 거다
그래서 내가 강 건너 산을 보며 말했지
바람만큼이나 빤한 말씀
그러자 선생이 다시 말씀하셨다
잘 때 딴생각 안 하고 잠만 잘 수 있어야 하고
먹을 때 딴생각 안 하고 먹을 수만 있어야 하고
쌀 때 딴생각 안 하고 쌀 수만 있어야 한다
고개를 세 번 끄덕였는데 그때마다 짝사랑하는 여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런 삶이라면 도전해볼 만하겠어요
선생과 나는 말없이 앉아만 있었네
강물이 강물을 밀치는 소리
풀과 풀 사이를 벌레가 뛰어넘는 소리
내가 늙어서 선생이 되는 소리
선생이 흰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들고 후 불며 새로 변신하는 소리
선생은 날아가며 한 말씀 더 하셨지
갈 때 안 됐냐 바쁘다며
대답도 안 듣고 선생은 날아가고
빈 하늘은 종이마냥 흔들리고
나는 벌린 팔을 움츠리려고 어깨에 힘을 줘보는데
그저 살 부딪치는 소리
가볍게 가볍게 그늘을 몸 밖으로 튕겨내며 시원해지는 소리
—《문학과 사회》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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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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