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계문화유산(642)/ 탄자니아/ 잔지바르 석조 도시
세계문화유산(642)/ 탄자니아
잔지바르 석조 도시(Stone Town of Zanzibar; 2000)
Zanzibar sultan palace
A panorama of Zanzibar, particularly the Stone Town, taken from the Indian Ocean. Seen in the picture are the Sultan's palace, House of Wonders, Forodhani Gardens, and the St. Joseph's Cathedral
Stone Town panorama
The old fort as seen from the House of Wonders
The House of Wonders, now hosting a museum on Swahili culture
Effects of the British naval bombardment of the 1896 Anglo-Zanzibar War
Slavery memorial - Stone Town-1
A Zanzibari 'basi'(bus)
Zanzibari cuisine is sold at the Forodhani gardens
A photo of two girls holding hands behind a traditional wooden door in Stone town, Zanzibar
Stone town indian wooden door
Traditional, Zanzibari carved wooden door
잔지바르(Zanzibar)의 석조 도시는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Swahili) 해안 무역 도시의 좋은 사례이다. 석조 도시는 도시 구조와 경관을 거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1,000년이 넘도록 아프리카・아랍・인도・유럽 문화의 이질적인 요소를 통합시켜 온 특별한 문화를 반영하는 훌륭한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세기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 활발한 해상 무역 활동이 있었고, 이는 석조 도시의 건축과 도시 구조에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나타나 있다. 잔지바르는 또한 노예 제도 금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는데, 그 이유는 잔지바르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같은 노예 제도 반대자들이 캠페인을 벌였던 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주요 노예 무역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두 주요한 문화적 전통이 융합하여 동아프리카 해안 지대의 스와힐리 문명을 형성하였다. 일련의 항구 도시가 아프리카 내륙과 인도양을 지나 분포하고 있는 육지의 영향을 받아 개발되었다. 젠지 바르(Zenj bar; 검은 제국)로 알려진 작은 해안 도시 국가들은 통제력이 느슨한 동맹이었다. 젠지 바르는 8~10세기에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작은 해안 도시 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다. 오늘날의 잔지바르는 ‘흑인의 해안[The coast of the blacks]’ 뜻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아랍 어에서 따온 것이다. 잔지바르 섬의 가장 초기 유적은 은구자 우쿠우(Unguja Ukuu)에서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5세기의 로마와 사산-이슬람 양식 도자기들을 발견하였다. 근처에는 키짐카지(Kizimkazi)의 12세기 초 모스크가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8~15세기에 광범위하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며, 이 문명은 아마도 14세기의 킬와(Kilwa)에서 전성기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와힐리의 경제는 15세기 말 포르투갈 인이 들어오면서 불안정해졌다. 1499년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인도를 방문한 이후로, 포르투갈 인들은 교역 활동의 일부로 스와힐리 해안 전체에 통제력이 강하지 않은 종주권(宗主權)을 가졌다. 터키 인들이나 이후 경쟁 관계의 유럽 강대국들은 이곳의 종주권을 노리고 도전했는데 이런 이유로 포루투갈 인은 이곳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교회와 상인의 주택이 잔지바르 샹가니(Shangani)에 들어섰다. 10세기부터 형성된 마을인 샹가니는 종려나무 잎으로 지붕을 얹고 단순하게 초벽을 바른 건물이 어촌 마을이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나중에 해안 지구에 대규모 요새를 더 지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인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고, 17세기 말 몸바사(Mombasa)의 포트지저스(Fort Jesus)에서 쫓겨나면서 그 영향력도 사라졌다. 포르투갈 인이 해왔던 곡물・건어물・상아 그리고 노예무역은 오만의 아랍 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오만의 통치자 사이이드(Sayyid)는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석조 건물을 많이 건축했고, 킬와의 거대한 무역 중심지를 통해 근본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시라지(Shirazi; 14세기 이슬람 문화 중심지)로부터 기술을 수입하였다. 포르투갈 인에 의해 시작된 노예무역은, 포르투갈 인들이 인도양과 카리브 해에 있는 섬에 있는 프랑스 설탕 재배 농장에 노예를 조달하던 때인 18세기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발발한 전쟁의 결과로 노예무역은 혼란해졌다. 이 때문에 노예는 잔지바르 섬의 정향나무 농장에 보내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또한 인도양 지역 무역이 크게 확장되었던 시대이다. 지배 세력인 잔지바르의 이슬람 왕조와 인도인・스와힐리 인・아랍 인, 내륙에서 온 아프리카 인 등 외국인 상인들은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들은 궁전과 훌륭한 저택들을 건축하여 석조 해양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궁전과 저택들은 다양한 양식과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특히 스와힐리 건축 양식이 융합되고 통합되었다. 통치자 음위니 음쿠우 하산(Mwinyi Mkuu Hasan)이 자신의 궁전 너머에 반도의 육지를 떠났다. 포르투갈 인들이 떠난 뒤로는 처음으로 도시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곳에는 해안의 다른 지역에서 온 스와힐리 인 이주자들과 하드라마우트(Hadhramaut)에서 온 아랍 인들이 정착했다. 이들은 미너렛 모스크(Minaret Mosque; 첨탑이 있는 모스크)를 건축했다. 19세기 스와힐리 전통 양식은 홍수처럼 몰려든 이민자들이 들여온 새로운 양식에 압도당했다. 당시에는 이전 양식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수입된 세부 장식들이 도입되어 이른 바 ‘스와힐리 주택[Swahili house]’이 출현한 것이다. 오만 인들은 전혀 다른 전통 방식을 도입하였는데, 즉 산호 세공, 모르타르 회벽, 평평한 지붕을 얹은 단단한 다층 건물을 대규모로 짓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붕은 잔지바르의 습윤 기후(濕潤氣候) 때문에 골진 강철판이나 타일로 만든 경사진 지붕으로 빠르게 대체되어 갔다. 이런 건축물은 형태면에서 평평하며, 유일하게 눈에 띄는 외부 특징은 정교하게 조각된 목조 문이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내부는 호화로운 장식과 화려한 가구들이 비치되어 있다. 세 번째 건축 구성 요소는 인도에서 비롯되었다. 인도인 무역상은 오만 인 주택을 구매하거나 넓은 베란다를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구자라트 인들의 하벨리(haveli; 인도의 대저택)를 연상시키는 정교하게 장식된 주택을 건설했다. 인도인 주택의 특징은 거리를 면한 쪽에 가게를 두고 살림집은 뒤쪽으로 두었다. 주택 소유자들이 점차 부유해지자 그들은 흔히 2층을 올렸는데, 주거 공간은 전부 위층에 두고 아래층은 상업 활동 용도로 한정하여 이용했다. 현대적 도시 개발은 술탄 바르가시(Sultan Barghash; 재위 1870~1888)의 치세 중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인도에서, 1875년 유럽에서 망명하는 동안 건축물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도시들을 모방하고자 하였다. 석조 도시의 건축에서 술탄 바르가시의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경이로운 집[House of Wonders]’이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파이프를 통해 물을 도시까지 공급한 것이었다. 건축 개발의 최종 단계는 잔지바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된 1890년에 영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식민지 건축 양식을 들여왔으나 건축가 존 싱클레어(John Sinclair)의 영향으로 이스탄불과 모로코의 이슬람 건축 양식에서 유래한 많은 특징들을 도입했다. 영국인들은 엄격한 건축 규정을 도입하였고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였다. 1920년대 이후부터는 도시 계획 법령이 공포되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에 유럽 인들의 선교 활동이 많아짐에 따라 고딕 양식인 성공회 대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인 로마 가톨릭 대성당이 건축되었다. 성공회 대성당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에게서 영감을 받아 마지막 노예 시장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졌으며, 그리하여 노예무역은 영국인들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아랍의 지배는 혁명과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1964년 끝나게 되었다. 이는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부유한 아랍 및 인도 상인들과 장인들 다수가 좋은 집과 상업용 건물을 버리고 그 나라를 떠났다. 정부는 시골 지역과 이웃 섬 펨바(Pemba)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인도・아랍 인이 떠나 폐허가 된 주택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석조 도시에서 신축은 확장된 지역에 개발이 집중되었던 1960년대 후반 및 1970년대 초에 끝나게 되었다. 1980년대 이루어진 건축은 역사적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당시의 양식과 재료를 도입하여 건축하였다. 이것은 1985년 ‘석조 도시 보존 개발 공사[The Stone Town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Authority]’가 설립된 이후로는 일정 형태의 통일된 건물만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석조 도시의 발전상은 거리의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의 거리는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 아니므로 주택과 상점들로 인해 좁고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생겨났다. 대부분의 주택은 건물을 둘러싸는 공간은 있으나 개방 공공 공간은 상당히 적다. 주 건설 자재는 두꺼운 석회 모르타르에 고정시킨 다음 회반죽을 바르고 석회로 세척한 산호질의 조암(粗岩)을 사용했다. 탁 트인 안뜰을 둔 토속 건축물은 좁은 통로와 좁은 방으로 구성된 2층 건물이 압도적으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