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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절벽 사원에 부리가 노란 까마귀가 산다 / 김태형

문근영 2017. 10. 31. 12:47

절벽 사원에 부리가 노란 까마귀가 산다

 

   김태형

 

 

 

눈 녹은 물줄기조차 흐르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설산은 그 뒤에 멀리 있을 뿐이다

나는 고대의 세계관을 믿는다

세상의 끝은 절벽이다

이곳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 사원이 있어야 할 것인가

가장 마지막에 신을 찾는다고 했던가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세례를 받았다

 

기어오르기도 힘든 가파른 곳에 진흙을 이겨 벽을 세웠다

방을 만들고 작은 창을 내어서

절벽은 그 아래를 건너다보는 곳이 되었다

절벽까지 찾아온 이들을 세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곳이 되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다 숨이 차서 뒤돌아보니

아래층 지붕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부리가 노란 까마귀

둘러봐야 아무것도 없다

걸어서 갔다 오면 하루는 족히 걸릴 만한 곳에 설산이 가로놓여 있다

눈표범이 자취를 감추는 동안 며칠 만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또 설산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어디든 다 황량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부리가 노란 까마귀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황량한 고원에서 까마귀들이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까마귀는 사원 뒤쪽이 아니라

멀리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 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러다가 바람 한 자락을 끊어서

무슨 영혼인 듯 날아간다

그곳이 세상이라는 듯이

사원도 그쪽으로 계단을 내려놓는다

와서는 다시 되돌아가야 할 곳이 저기라는 듯이

 

 

 

                       —《시와 사상》2016년 겨울호

                     제 4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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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1970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코끼리 주파수』『고백이라는 장르』, 시선집『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아름다움에 병든 자』『하루 맑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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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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