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바람의 둥지 / 권택명
바람의 둥지
—혼다 히사시(本多壽) 시인에게
권택명
남쪽 나라, 선열한 보라색 부겐베리아가 피는 미야자키(宮崎)
그 산촌 다카오카(高岡)의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곳일 듯한 하나미(花見)에는
눈물 많은 몸집 큰 사내가 살고 있다
아련한 시의 향기와
고서 냄새가 떠돌고 있는 집터 한 구석에는
인간의 나이로는 아흔이라는
평생 짖어본 적이 없는 듯한
혈통 있는 개도 한 마리
약간은 졸린 듯한 주인 얼굴을 하고
오랜 세월을 함께 나누고 있다
키 작은 귤나무 밭이랑
하늘 향해 수천의 손을 펼치고 있는 키 큰 백단향나무
머위가 무성하고 뱀딸기가 숨어있는
숲 한가운데
고즈넉이 숨 쉬고 있는 시인의 집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아니, 바람과의 동거를 바라며 건축된 거실에는
사계마다 색색의 바람이
구석구석까지 둥지를 둘러놓고 있어서
마치 집주인 같다
5월에는 반쯤 핀 귤꽃의
이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향기가
방과 집 전체를 뒤덮고
가을에는 오렌지빛 귤이
하나 둘 셋에서 시작하여
수백 수천의 등불을 달고
숲을 따뜻하게 불태우고 있다
새와 풀, 꽃과 열매, 개구리와 뱀까지가
대자연의 코러스를 이루는 사이에서
시인은 오늘도 오로지
아름다움의 추억과 사랑의 기억을 자아내어
우주를 향해 계속 발신하고 있다
이 비애로 가득 찬 지상에서
이 세상의 속절없는
슬픔과 아픔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시와 표현》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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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택명 / 1950년 경북 월성군 출생. 1974년 박목월 추천으로 월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사랑·이후』『그림자가 있는 빈터』『영원 그 너머로』『첼로를 들으며』『예루살렘의 노을』 기타 저서 『아픔을 웃음으로 거머쥔 백발에게』『한국의 율리시즈 김광림(시인론 작품론 인간론)』 등. 현재 한국펄벅재단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