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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 먹는 밤 / 김이듬

문근영 2017. 10. 31. 12:40

물 먹는 밤

 

   김이듬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누가 내 머리를 물속에 담가 누르는 것인지 숨이 안 쉬어져요

 

심야영화를 보고 나오니 자정이 넘었다

오늘도 잠이 들면 혀를 말고 지하 주차장에서 헤엄쳐 식물원 온실까지 갈까

꿈에 공항 검색대 앞에서 사람들은 내 입을 찢어지게 벌려놓고 내 입속에 물을 버렸다

 

의사는 수면무호흡증이라고 말했지만

건반 위에 멈춘 손가락처럼 나는 건널목에 길게 서 있었다

손을 모아 로즈마리 로즈라임 향이 나는 핸드로션 냄새를 맡았다

입이 막혔다

 

7시간 잠자는 내내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 같다

누군가 내 머리를 파도에 박아 놓고 킬킬거린다

말하라 너는 7시간 동안 뭘 했는가

여성의 사생활이 아니다

아이들이 죽어 가는 동안 너의 행적을

 

없애 버려서 축하합니다

없애 버려서 축하합니다

젖꼭지를 물어뜯는 가노코를 버리든가 죽이고 싶습니다

나는 영아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낳자마자 버리면 간단합니다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중절보다 간단합니다*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 온 시집처럼 악몽의 페이지는 찢을 수 없고

간만에 본 영화는 잔인하기가 상상 밖이었다

그것들은 여기에 지금 있다

 

냉수를 한 컵 마시고 베개를 안고 나는

지랄발광의 5개년 계획을 세운다

잠들지 않았는데 잠든 이처럼 숨이 안 쉬어진다

 

 

  ———

  * 이토 히로미.

 

 

                        —《계간 파란》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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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포에지》를 통해 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 』,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 연구서 『한국현대페미니즘 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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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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