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울타리 / 조말선

문근영 2017. 10. 31. 12:38

울타리

 

   조말선

 

 

 

   울타리는 가고 있다 울타리는 나지막한 끝말을 이어가고 있다 자주제비울타리콩 다음에 자주제비울타리콩덩쿨 자주제비울타리콩덩쿨 다음에 자주제비울타리콩덩쿨손이 얽히고설킨 다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울타리를 귀담아듣는 울타리가 다음 순서다

 

   드문드문하고 휘어지고 허술하게 엮어놓은 말 때문에 쉽게 넘어지는 울타리는 중간 말을 이어간다 울타리는 에워싸지 않고 에워싸고 지킬 것 없이 지키고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정하는 성질 때문에 가운데가 텅 비었다

 

   울타리는 이끌고 가는 데 능하다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형식을 빙 둘러서 간다 단번에 뛰어넘을 결심을 했다면 손에 든 가방부터 훌쩍 집어던진 그다음에

 

   울타리는 밟지 않는다 울타리는 걷어차지 않는다 울타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확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울타리는 끝없는 말을 이어가므로 출입문을 통해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울타리는 나를 좀 얽히게 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면 자주제비울타리콩이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콩이 되도록

   울타리는 나를 좀 설키게 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빙 둘러 갈 수도 있다면 자주제비울타리콩이 빙 둘러서 콩이 되도록

 

   울타리는 길지만 높이를 지향하기 때문에 울타리과에 속하는 것들은 동물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울타리를 타고 울타리를 옭아매고 울타리를 친친 감는다

 

   울타리는 뒷말을 이어간다 울타리는 끝까지 끝나지 않는다 울타리는 지루한 말이 아니고 길고 긴 형식이다

 

 

 

                      —계간《포지션》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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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선 /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1998년 〈부산일보〉신춘문예, 《현대시학》등단. 시집『매우 가벼운 담론』『둥근 발작』『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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