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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리 공장 / 이영주

문근영 2017. 10. 31. 12:30

유리 공장

 

    이영주

 

 

 

   너는 늙고 어려운 마음,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너는 유럽식 모자를 쓰고 서 있다. 어두운 굴뚝 위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너는 먼 곳을 걷다가 얼음 속에 갇힌 적이 있다. 깨끗했고 추웠지. 너는 모자를 고쳐 쓰며 말한다. 그때 나이를 잃었나. 부정否定을 잃었나. 끈끈한 어둠도 갇혔지. 죽지 않는 소년이고 싶어서 말이지.

 

   나는 유럽식 찬장에서 너를 보고 있다. 불에 구워졌다가 빠져나온 딱딱한 얼룩처럼. 무력한 곰팡이처럼.

 

   유리 안에 갇힌 나를 보며 너는 웃는다.

 

  뛰어난 유리 제조공이었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불투명한 유리를 끼워놓은 자. 먼 곳을 돌아와 그릇처럼 조용히 시간을 쌓아 놓은 자. 유리 제조공은 말했지. 불순물은 닦아낼수록 깊어진다니 너무 깨끗하게 닦지 마시오. 더께가 쌓이면 유리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벗는다고 한다.

 

   너는 모자를 벗으며 유리 안을 본다. 얼음 속에서 죽지 않는 소년을 제조하고 싶었지. 너는 사라지는 표정을 들여다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수건으로 유리 찬장을 닦는 어렵고 긴 마음. 매번 실패하는 것은 나이를 가둬서인가 부정을 버려서인가. 무늬로 뒤덮인 불멸의 강화유리가 되고 싶었지.

 

   너는 굴뚝을 향해 걸어간다. 얼음에 갇혀 무엇을 잃었나. 흰 구름, 흰 얼룩, 흰 머리, 흰 이빨……  너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말고 굴뚝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는 늙은이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흰 포자를 퍼뜨린다. 이제 소년은 살아나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흰 소년은 살아 있기만 할 것인데 이것은 유리의 마음이 될 것인데

 

 

 

                      —《현대문학》 201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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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문학동네》로 등단. 시집『108번째 사내』『언니에게』『차가운 사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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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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