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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채구의 물빛을 어이 옮길까 / 강명관

문근영 2017. 10. 31. 03:14

제65호 (2007.11.7)


구채구의 물빛을 어이 옮길까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중국 구채구를 다녀왔다. 가을 단풍이 한창인 오전 나절의 계곡은 바람 한 점 없었고, 산정의 만년설은 녹아 골짜기를 흐르다, 개활지를 만나면 넓은 거울이 되어 단풍 든 산을 완벽하게 복사하고 있었다. 명경지수란 말을 실감했다.


물은 비취빛이었다. 워낙 맑아 바닥에 쓰러져 누운 나무까지 환히 보였다. 듣던 대로 불이(不二)의 미(美)였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색이 아니었다. 계곡을 내려와 사진첩을 샀다. 전문가가 찍은 사진 속의 풍경과 물빛은 나의 카메라에 포착된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역시 내가 보았던 그 풍경과 물빛은 아니었다.


언어로 세상을 재현할 수 있는가?


귀국하여 몇 줄 여행기를 쓰려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수삼년 동안 몇 차례 여행 뒤 부질없는 짓이라 싶어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는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해서 몇 마디 적어 훗날 기억을 떠올리는 꼬투리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계곡 물의 이미지만 어렴풋하게 혹은 토막토막 떠오를 뿐이었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루 종일 짐승을 쫓았으되, 결국은 포획하지 못한 무능한 사냥꾼일 뿐이었다. 내 언어의 능력으로 그 다채로운 물빛과 다양한 호소(湖沼)의 형태를 재현한다는 것은 하마 무망한 일이었다. 그 부실한 언어가, 내가 경험했던, 곧 나의 의식에 현전했던 그 미묘한 빛과 소리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속삭이며 흐르다가 순간 땅 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다시 지층을 뚫고 솟아나 떨어지던 폭포의 장쾌한 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 얼굴에 스치던 물방울들, 바람 속에 섞인 수목의 향(香), 그리고 호소의 비취빛을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르던 어린 날의 체험(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저수지에 빠졌고, 그때 소리로부터 단절된 물 속에서 보았던 물빛은 이상하게도 비취빛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머리 속에서 접히고 펼쳐지면서 느꼈던 기묘한 감각, 이것들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벽록색 액체 속에 침중하게 누운 아름드리나무가 웅얼거리며 건네는, 침묵의 소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지각으로, 언어로, 저 건너에 있는 세상을 재현하는 노력이야말로 무망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언어적 재현물을 보고, 리얼리티를 얻었다고 말한다. 언어〓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언어는 언어의 질서를, 세계는 세계의 질서를 갖는다. 결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혹간 특이한 언어적 재현능력을 갖는 사람이 있어, 세계의 재현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 재현물은 원본과는 상관없는 독립된 사물일 뿐이다. 구채구의 계곡 물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했다.


연암, “나는 오늘 책을 읽었다!”


연암(燕巖)은 이렇게 말한다.


  저 허공을 날며 우는 것은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런데 새 ‘鳥’ 자 하나로 싸잡아 그 색채를 뭉개버리고 그 모습이며 소리를 놓쳐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나들이를 나가는 시골 영감의 지팡이 끝에 새긴 비둘기와 다를 게 무어 있겠습니까. 혹간 그것이 항용 하는 말이라 싫어하여 가볍고 맑은 말로 바꾸고자 해서 ‘禽’ 자로 대신해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자의 잘못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녹음이 우거진 뜰에 이 계절의 새가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부채를 들어 안상을 치며, 소리 쳤습니다. “이것이 나의 날아갔다 날아왔다 하는 글자요, 서로 울고 답하는 글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이라 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나는 오늘 책을 읽었다.”


연암은 낡은 언어를 통한 세계의 재현이 불가능함을 먼저 말한다. 하지만 그것뿐인가. 그는 나아가 언어로 세상을 재현하기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연암은 녹음 우거진 숲에서 새가 지저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문장이라고 말함으로써, 언어로 재현되지 않는 세계 자체를 말한다. 언어가 매개되지 않는 세계를 볼 것! 이것이 연암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언어가 불완전한 기호라는 것은 네남없이 다 아는 사실이다. 연암이 하마 그 한계를 말했거늘, 구채구의 절경을 말로 얽어내려고 했으니, 어리석도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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