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계문화유산(596)/ 모로코/ 볼루빌리스 고고 유적
세계문화유산(596)/ 모로코
볼루빌리스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Volubilis; 1997)
메크네스 주[Wilaya de Meknes-Province], 메크네스 엘멘제 물레이 이드리스 제르훈(Meknes El Menzeh Meulay-Idriss Zerhoun)에 위치한 볼루빌리스는 기원전 3세기 모리타니아의 수도였으며, 로마 제국의 중요한 전초 기지로서 발전했고, 수많은 인상적인 건물들로 유명한 도시이다. 비옥한 농경지의 고고 유적지에는 지금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볼루빌리스는 훗날 잠시 동안 이드리스 1세가 세운 이드리스 왕조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드리스 1세는 인근 물레이 이드리스(Moulay Idris)에 잠들어 있다.
볼루빌리스는 로마 제국 변경에 있는 잘 보존된 식민 도시의 사례이다. 선사시대에서 이슬람 시대까지 10세기 동안의 몇몇 문명을 대표하는 고고 유적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모자이크에서부터 대리석・청동상・수백 종의 비문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예술적 가치를 가진 유적들이 남아 있어, 수세기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인류의 창조적 정신을 증언하고 있다. 볼루빌리스라는 이름은 유적이 있는 장소는 물론이고 여러 비문 자료와 고대 문헌에도 나와 있다. 로마의 지리학자인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는 기원후 1세기 무렵 볼루빌리스를 ‘소박한 크기의 도시’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곳을 방문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문헌과 2세기의 여행 안내서인 <안토니네 여행기(Antonine Itinerary)>에도 그 위치가 나와 있지만 크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적을 관통해 지나는 와디 쿠마네(Wadi Khoumane)의 경사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식물인 협죽도(夾竹桃)의 베르베르 말 ‘우알릴트(oualilt)’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볼루빌리스는 제르훈 산 아래의 방어가 용이한 지역에 있으며, 그 평원의 토양은 농경과 과수 특히 올리브 재배에 적합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카르타고의 비문에 따르면, 볼루빌리스에서 정착은 최소 기원전 3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볼루빌리스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0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았던 모리타니아 왕조 시대에 이미 방어용 성벽을 갖추었다. 당시 이곳은 카르타고-헬레니즘 양식에 따라 도시 배치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볼루빌리스는 프톨레마이오스(기원전 25~기원후 40년)와 주바 2세(Juba Ⅱ)의 통치기에 로만 라인(Roman Line)을 따라 개발되었으며, 당시 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은 기원후 40년에 모리타니아 왕국을 복속하면서 두 지방이 만들어졌다. 볼루빌리스는 이 중 하나로 ‘자치 도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도시는 많은 공공건물과 민간 건물을 건축하면서 상당히 빠르게 확장되었다. 나중에 수공예 및 산업 활동과 관련된 건물들이 추가되었으며, 이 지역의 대표 상품인 올리브 생산이 활발해졌다. 비문에 나타난 증거들에 따르면, 로마 시대 볼루빌리스에는 유대인・시리아 인・스페인 인 등 여러 인종들이 토착민인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8개의 거대한 성문이 있는 성벽과 의회, 바실리카 등이 건설되었다(168~169). 그리고 세베루스의 황제들이 의회와 바실리카 등의 새 기념물들을 건축하였다. 이는 카라칼라(Caracalla) 황제가 자신에게 봉헌된 개선문 건축을 기념해 세금을 감면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중앙 도로[decumanus maximus]에 있는 카라칼라 개선문은 카르타고-그리스 도시와 북동쪽으로 확장한 로마 시대의 교차 지역이 어떤 곳이었는지 보여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무렵인 285년,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로마가 남부 틴지타나를 버렸다. 그리고 볼루빌리스는 ‘암흑 시기’로 접어들었다. 도시로 물을 실어 나르던 수로가 망가지면서 사람들은 개선문 서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와디 쿠마네 인근에 새 정착지를 건설했다. 새 정착지는 훗날 강 제방이 무너져서 새로 방어 성벽을 건설했으며, 이 성벽으로 인해 도시 위쪽과 구분되었다. 개선문이 있던 지역은 새로 조성된 공동체의 묘지가 되었다. 599~655년으로 추정되는 4개 비문에 따르면, 이곳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묘지였다. 오크바 벤 나피(Oqba ben Nafi; 681)나 무사 벤 나사이르(Moussa ben Nossair; 710)의 침략이 볼루빌리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문헌과 발굴된 고대의 동전들은 볼루빌리스가 이드리스 왕조 이전에 이슬람 사회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칼리프 알리의 후손인 이드리스 1세는 압바시드(Abbassids)와 시테스(Shites)가 분쟁을 벌이는 동안 모로코로 피신하였다. 볼루빌리스 주변에 살던 아오마바(Aomaba) 족 족장은 그를 받아들였다. 이드리스는 신속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왈리리아(Walila; 볼루빌리스)를 수도로 삼았으며, 페스(Fez)에 새로운 도시를 창건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이드리스 2세(803~829)는 볼루빌리스보다 페스를 좋아했다. 나중에 791년 이드리스 왕조의 창시자 이드리스 1세가 죽은 이후에 물레이 이드리스 인근의 새 도시로 사람들의 이주 움직임이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볼루빌리스가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엘 베크리(El Bekri)는 1068년 무렵 이곳이 여전히 이드리스 왕조의 도시였음을 기록에 남겼다. 그러다 11세기 말, 알모라비드(Almoravid)의 침략으로 오랜 세기에 걸친 이드리스 왕조의 지배는 끝났다. 오늘날의 볼루빌리스 유적은 이곳에 원래 있었던 고대 도시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곳의 유적들은 2개의 와디[물이 없는 수로]인 쿠마네(Khoumane)와 페르다사(Ferdassa)에 의해 나눠져 제벨 제르훈의 아래쪽에 있었다. 이 고대 도시는 8개의 성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40채의 성벽 유적들로 잘 설정되어 있다. 볼루빌리스의 건물들은 대부분 제르훈 대산괴 인근에서 채취한 청회색의 석회를 사용해 지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모자이크 바닥으로 유명하다. 비록 다른 북아프리카 지역의 모자이크 수준의 예술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형태와 주제가 생생하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바실리카 남쪽 끝에 인접한 곳에는 카피톨리움(capitolium)이 있고, 이곳의 성소는 널찍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인근에는 목욕탕이 있는데, 한 차례 이상 재건축이 이뤄진 증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