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너바나 / 리산
문근영
2017. 9. 7. 01:06
너바나
리산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겯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 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스푼의 온기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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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2013년 문학동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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