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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문근영 2017. 9. 7. 01:03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입교당 담벼락에 어리는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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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립스틱 발달사』 2013년 천년의 시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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