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계문화유산(573)/ 리비아/ 렙티스 마그나 고고 유적
세계문화유산(573)/ 리비아
렙티스 마그나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Leptis Magna; 1982)
콤스 지역[District of Khoms]에 속한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는 고대 로마 시대의 걸출한 도시 유적이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후일 로마의 황제가 된 루시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확장되고 정비된 이곳은 로마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유적 중 하나이다. 당시의 공공 건축물, 항구 시설, 시장, 창고, 상점, 주거 지역 등이 놀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렙티스 마그나는 도시 계획 영역에서 독특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도시이다. 키레네와 함께 고대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으로 정교한 신고전주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1000년에 페니키아(Phoenicia)의 항구 도시로 건설되어 카르타고(Carthago) 영토의 일부였던 이 도시는 잠시 동안 누미디아(Numidia)의 왕 마시니사(Massinissa)의 지배하에 있었다.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Jugurtha)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곳에 주둔을 하고 있던 로마 인들이 기원전 46년에 이 도시를 아프리카의 한 지방으로 통합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렙티스(Leptis; 페니키아의 이름을 라틴 어로 표기한 이름)는 시르티안(Syrtian) 해안의 사브라타(Sabratha)와 같은 다른 페니키아의 무역 중심지와 필적할 만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3년에 로마 황제가 되면서 상당히 번창하였다. 세베루스 시절, 새롭게 단장된 렙티스는 로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였다. 아직도 세베란(Severan)의 도시 계획은 최고의 예로 손꼽힌다. 그 이후 렙티스는 아프리카의 대부분 해안 도시들처럼 성쇠를 겪었다. 4세기부터 약탈에 시달리다가 비잔틴 제국에 다시 정복되어 중심지로 변모하였으나 11세기 들어 다시 밀려드는 아랍의 침략을 견디지 못했으며, 결국 힐랄 족[Banu Hilal]의 침략 때 확실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모래사막 아래에 묻혀 있던 이 도시는 오랜 고고 발굴을 통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도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와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시절에 건설되었지만 세베루스의 야심찬 계획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단장을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주요 건축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포럼・바실리카・세베루스 아치 구조물은 새로운 로마 예술의 최고의 사례에 속하며, 아프리카와 동양 전통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직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는 세베루스 바실리카와 세베루스 아치 구조물, 트리폴리의 박물관에 있는 조각들은 명확한 직선 형태가 혁신적이며, 웅장한 크기의 윤곽과 직각 설계가 참신하여 아프리카의 태양을 가려 주는 역할을 하도록 구상된 종합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02,000㎢의 인공 정박지를 가진 고대의 항구에는 아직도 부두와 방파제, 요새, 창고, 신전이 남아 있다. 지중해 서쪽의 위험한 급류로 흘러드는 와디 레브다(Wadi Lebda)의 흐름을 조절하도록 만든 댐과 수로는 로마 기술의 걸작이다. 이 댐과 수로는 네로 황제 당시에 발굴되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에 정비하였다. 큰 상업 중심지의 일상생활에 필수 요소인 시장에는 봉헌 아치[votive arch]와 열주 및 상점들이 들어서 있으며,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부터 내려오는 건축물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 변형되고 정비되었다. 창고와 작업장들 또한 이곳이 상업과 공업이 활발했던 도시였음을 말해 주는데 명성이 높은 기념 건축물들과 아치와 문, 원래의 포럼과 세베루스 시절의 포럼, 신전, 공중목욕탕, 극장, 원형 극장은 전 지역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