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담쟁이 / 류운

문근영 2010. 1. 31. 10:54

담쟁이 / 류운



바야흐로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입니다
내 것 하나 없어 집에서 피죽도 못 먹은
식솔들 이끌고 담을 오릅니다


매번 하는 짓이지만 겁이 납니다.
지문도 닳아빠진 맨손으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저 어린 것들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담을 오르는데,
바지춤을 붙들고 동네방네 떠드는 등나무
피차에 같은 처지에
자기는 나무만 타지 담은 넘지 않는다며
훈계하네요


실상, 훔치는 일은 날렵한 바람이 하고요
꼬임에 빠져 망만 봤는데
월담하다 주인 눈에 띄는 날에는
꼼짝 없이 동네에서 내쫓기고 말지요


산다는 건 세상을 훔쳐내는 것
졸고 있던 하늘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낯을 붉히며 돌아눕네요
이 무슨 망신입니까


낯뜨거워 황급히 내려오는데
줄줄이 따라오는 시선들
정말 어린 것들 앞에서 할 짓이 못됩니다
배운 거라곤 담을 타는 일
암자가 있는 큰 바위에 올라
푸른 하늘이나 배불리 먹여야겠습니다


바위에 올라 이슬 내리는 새벽까지
두 손 모아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오르는 일이 이토록 떳떳한 일임을
담을 탈 때는 몰랐습니다


하늘은 말합니다
그만 내려가 남의 것 탐하지 말고
더러운 곳 찾아 푸르게 덮으며 살라 하고
여전히 거리낌 없이 탐하는 세상
바위만 오르며 살고 싶은데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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